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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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 루터와 멜랑히톤
10월 마지막 주일은 전 세계 모든 개신교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이유는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 개혁자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다가 95개조 항의문을 써 붙이고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종교개혁에서는 마르틴 루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루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그의 친구 필립 멜랑히톤이며, 목회적으로는 루터의 결혼을 주례한 부겐하겐이며, 가정적으로는 그의 아내 카탈리나 폰 보라였습니다. 그 중에서 멜랑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멜랑히톤은 1497년 2월 16일 브라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필립 슈바르츠에르트였으나 그의 친척이며 유명한 인문주의 학자인 요하네스 로이힐린이 이름을 멜랑히톤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어 습득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21세가 된 1518년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523년에는 이 대학의 총장이 되어 종교개혁을 실제로 실천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멜랑히톤은 루터의 측근이 되어 수많은 저서들과 학교교칙, 예배 교안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역사적인 개신교 신앙고백서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집필한 걸출한 대학자였습니다. 멜랑히톤은 루터에 대하여 “나는 그로부터 복음을 배웠다”라고 1540년 고백할 만큼 루터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반면에 1521년 칭의론에 입각한 성경개론이며 첫 번째 개신교 교의 신학인 ‘로치 콤무네스’는 루터의 사상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작품입니다. 1542년 루터는 이 책에 대하여 “성경 다음으로 이 책보다 나은 책은 없다”라고 격찬하였습니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 옆에 멜랑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을 만큼 그는 루터의 동역자이며 종교개혁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었습니다. 멜랑히톤은 독일 교육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헬라어 교본을 집필하였고, 플라톤을 비롯한 헬라 철학과 인문학에 능통하였고, 당시의 대학자인 에라스무스처럼 뛰어난 고전과 성경지식 뿐만 아니라 논리적 치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독일의 중등학교(gymnasium)를 창설하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체계를 개혁하여 ‘독일의 스승’이라 불렸습니다. 그의 학문과 재능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멜랑히톤은 격정적인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행동가라기보다 학자적이었고, 학자이기를 고수했을 만큼 냉정하고 이성적인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에 참여한 후에도 계속 수사처럼 살았습니다. 어느 날 멜랑히톤의 고매한 절제력을 참다못한 루터가 소리쳤습니다. “제발 밖에 나가서 죄를 좀 짓고 와 보게. 그래야 하나님도 자네를 용서하실 게 있지 않겠는가?” 격정적 행동가인 루터에게 이성적 학자인 멜랑히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루터에게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의 동반자였습니다. 이런 동반자가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종교개혁을 함으로 인하여 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있었고 바른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바르게 세우고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목사 김 종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