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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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입니다. 그것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습니다. 부자나 권력자는 자신의 미성숙함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손상을 입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보복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온갖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은 필연적입니다. 물론 고통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은 없고, 한없는 즐거움과 쾌락만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쾌락이 지속되면 허무해지고 그 허무는 또 다른 엄청난 중독의 고통을 생산합니다. 이것이 바로 쾌락의 역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이 두려워서 쾌락을 탐닉하거나 고통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 직면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건강한 반응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해석입니다. 해석을 잘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고통이 오면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결국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외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자신의 죄, 허물, 불성실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연단 하여 결국 성숙하게 하려고 고통을 허락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해석입니다. 고통이 왔을 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인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겪는 그 고통에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그것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고통 속에서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묵묵히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명 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은 사람입니다. 어떤 환자가 극심한 고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어느 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같은 병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을 위로하고 그분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통증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통은 그 사람에게 의미 있고 보람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연로하신 권사님들이 화요일마다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연로하신 어르신 들이 목요일마다 교회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관리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분들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있고 생기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 얼마 될지 모르지만, 나의 어떠함을 위해 사는 그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으로 누군가를 섬기는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목사 김 종 석